중학교·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통과한 뒤, 입시 개혁 덕에 등록금 면제와 생활비가 지원되는 장학 혜택을 보고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학원 대신 독학을 선택했고, 고시원에 살며 공부에 몰두한 끝에 장학금을 받고 중앙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는 이를 “전두환의 제도 개편 때문에 가능했던 역설”이라고 평가했다.
△ 중졸·고졸 검정고시를 통해 학력을 취득하고 대학에 진학하신 과정이 궁금합니다.
"중학교 검정고시는 하루 14시간씩 공부해서 1978년 8월에 붙었고, 고등학교 검정고시는 1980년 봄에 합격했습니다. 영어는 포기하고 나머지 과목에 집중했고, 시험은 독학으로 준비했습니다."
△ 당시 대학 진학의 동기가 된 건 무엇이었나요?
"사실 처음에는 대학 갈 꿈조차 없었죠.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본고사를 폐지하고 과외를 금지하면서, 수능 성적만으로도 대학에 갈 수 있게 됐고, 상위권 수험생에게 등록금 면제와 월 20만 원의 생활비를 주는 장학제도가 생겼습니다. 그게 제가 대학을 결심한 계기였어요. 월급보다 세 배나 많았거든요."
△ 입시 준비는 어떻게 하셨고, 성적은 어땠나요?
"입시학원을 처음 갔다가 40만 등대가 나와서 충격을 받았죠. 다음 달에는 10만 등, 그리고 계속 올라갔습니다. 결국 학원을 그만두고, 통학 시간까지 아끼려고 독서실에서 독학했습니다. 공부하다가 공장도 그만뒀고, 고시원에서 공부에 전념했죠."
△ 입시에서 선택한 대학과 전공은 어떻게 결정하셨나요?
"중앙대 법대에 진학했는데,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제 점수로 갈 수 있는 곳 중 커트라인이 가장 높았거든요. 원래 의대도 생각했지만, 의대는 장학금 면제가 안 됐고 돈이 들었기 때문에 선택지에서 제외했죠."
△ 대학 진학 이후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입학하자마자 바로 고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고졸 검정고시 자격만으로는 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렵다는 걸 느꼈거든요. 그리고 그 시점부터 법조인이 되기 위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중앙대 법대를 졸업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5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검사나 판사 대신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길을 택한 그는 성남으로 돌아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노동 사건, 주민 소송을 맡았다. 노무현 변호사의 "변호사는 굶지 않는다"는 말이 그의 결정을 뒷받침했다.
△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된 계기와 과정은 어땠나요?
"고졸 자격만으로는 관리자도 못 된다는 걸 알고 법대를 갔고, 그다음에는 사법고시밖에 없었습니다. 3학년 때 1차에 합격했다가 4학년 때 2차에 떨어지고, 졸업 후 5년 만에 합격했습니다."
△ 합격 후 검사나 판사가 아닌 변호사를 택하신 이유는요?
"사법연수원에서 노무현 변호사 강연을 들었는데, '변호사는 굶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이 깊게 남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개업이 두렵기도 했지만, 들어가면 못 나올 것 같았어요. 결국 성남으로 돌아가 노동·인권 변호사로 개업했습니다."
△ 26세 변호사로서 초기 개업은 어땠나요?
"사람들이 저를 보고 ‘변호사님 어디 가셨어요?’ 하고 묻곤 했어요. 젊으니까 안 믿는 거죠. 장사도 안 되고, 생맥주에 노가리 먹는 게 소원이었을 정도입니다."
△ 노동운동과 인권변호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성남의 ‘1터’라는 노동상담소에 자원봉사로 참여하면서 시작했고, 이후 성남과 광주, 이천 등지에서 노동조합 지원, 구속 노동자 변론, 노동 교육 등을 맡았습니다. 구속된 노동자 접견조차 거부당할 만큼 험한 환경이었지만,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 변호사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무엇인가요?
"성남 개발 당시 건설 마피아들과 충돌하면서 가스총을 차고 다닐 정도로 위협을 받았고, 공공병원 폐지 저지 운동에선 시의회와 정면 충돌했습니다. 그 운동이 막혔을 때 '시장 되어 직접 만들자'는 결심을 하게 됐죠."